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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광주여행] 뜻하지 않게 찾아가 본 광주호 호수 생태원에는...

은빛세상 2010. 11. 12. 22:37

 

 

 

백양사 가인 야영장에서 1박을 하고

장흥 천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광주분인 지인을 만나 찾아 간 곳이 광주호 호수 생태원.

광주호 호수 생태원에 도착하여 주차장을 들어서면

수령이 오래된 커다란 왕버들 세 그루가 제일 먼저 반깁니다.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 왕버들

 

이 왕버들 세 그루의 높이는 10m 내외로서 둘레는 6m정도이며 수령은 약 400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이 마을에는 일송일매오류라 하여 소나무 한 그루, 매화나무 한 그루, 왕버들 다섯 그루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왕버들 세 그루만 남아 있답니다.

 

 

 

 

 

 

 

 

이 일대는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의 유서 깊은 정자와 빼어난 풍광이

어우러져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왕버들 옆에 충효동 정려비각이 세워져있는데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충장공 김덕령과 형 덕홍, 아우 덕보, 부인 홍양이씨 등의 충. 효. 열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1788년 (정조 12) 왕명으로 '충효리'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 받고 이듬해  그 유래를 밝힌 이 비를 세웠는데,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792년에 처음 세웠다 합니다.

 

 

 

충장공 김덕령 충효리비

 

충효리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은 안내된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옛날에 충용장군 김덕령 공이 초야에서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휴악한 왜적을 막아냈다.

위엄과 명성이 일본에까지 진동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뜻밖의 화를 당해 죽었다.

그의 형 덕홍도 금산 전투에서 먼저 죽었고, 부인 이씨도 왜적을 만나 절개를 지키며 죽었다.

충과 열이 한 집안에 모였는데도 억울한 원한이 풀리지 못하고,

아름다운 빛이 나타나지 못하니 군자들이 슬피 여겼다.

현종 임금께서 비로소 공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병조참의를 추증하였으며,

숙종 임금께서는 병조판서를 가증하고 의열이라는 사액을 내려 주셨다.

지금 임금 무신(정조 12년, 1788년)에는 또 좌찬성을 가증하고

충장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으며,

이씨에게는 정경부인을 추증하고, 덕홍에게도 지평을 추증하였다.

이어 공의 고향 마을을 충효리라고 이름지어주고, 비석을 세워 표시하기 위하여,

신(臣) 서유린더러 그 뒷면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 이하 생략 -

 

 

 

충효리비를 접하고 나니 왠지...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어떤 분인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다음 백과사전을 찾아 봤습니다.

 

 

충장공 김덕령 장군

김덕령(金德齡, 1567년~1596년)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광산·광주(光州),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생애
1567년 광주(光州)에서 태어났다. 20세에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서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1593년 어머니의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의병장 곽재우와는 막역한 사이로, 작전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군공을 세웠다.

1596년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다.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거절하였고,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풀려났다.

후에 이몽학의 난이 일어난 뒤, 의병을 모집하여 진압하기 위해 충청도로 상경하다 반란이 진압되어 돌아갔다.

그러나 반군을 문초하던 중 최, 홍, 김이 적힌 패가 나와 문초하니 고문에 견디다 못한 졸개가

최담령, 홍계남, 김덕령 등 명망 있는 장수들의 이름을 무고했다.

신경행이 이에 무고를 하고 김덕령을 체포하였고, 선조가 친히 국문을 열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류성룡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윤근수의 형제이기도 했던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수백 번의 형장 심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김덕령은 결국 장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별장 최담령(崔聃齡)·최강(崔堈)을 사면하여 덕령이 모집한 군사를 거느리고 양남(兩南)의 방어사에게 나누어 배속시켰다.

최담령은 덕령과 함께 용력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죽은 이후 관직
1661년(현종 2)에 억울함이 밝혀져서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년)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88년(정조 12년)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逝特命)이 내려졌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이렇듯 김덕룡 장군에 대한 정보를 알고 이해하고 나니 

 난세에 누명을 쓰고 혹독한 고문으로 죽엄을 맞이한 김덕룡 장군의 한이

마치 내가 겪은 것 처럼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치는 건 왜일까?...

 

 

그동안 이분의 존재 조차도 몰랐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김덕룡 장군을 알게 되어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하며,

충장공 김덕령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해 놓은 무등산 충장사와

무등산 일대 김덕령 장군 전설 유적지를 돌아보는 숙제 하나가 더 생겼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한가지 더 배운 것은

광주시 충장로가 충장공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라네요.

광주분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을...

 

 

 

역사의 아픔을 뒤로하고 광주호 호수 생태원으로 향합니다.

 

 

광주호 호수 생태원은 5만 8천평의 부지에 자연관찰원, 자연학습장, 수중.습지,

초지지구, 야생호화원, 자생식물원, 잔디광장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 자연생태 학습장이더군요.

 

 

 

이 무덤은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흙을 쌓아 만든 조산이라는 것인데

말무덤이라고 합니다.

 

 

 

 

 

산책로 주변에는 억새꽃이 피어있는데, 석양 빛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억세를 봤더라면 하는 욕심을 가져 봤습니다.

 

 

 

 

 

잔잔한 호수가 마음을 치유해 주는 듯 합니다.

 

 

 

다정한 연인들이 함께 거닐던 호수위로 이어진 예쁜 산책로와

 

 

 

시원하게 쭉 뻗은 편백나무 숲길이 편안함을 줍니다.

 

 

 

전망대가 있어 호수 전체를 감상할 수 있는 호수 생태원...

 

 

 

저녁 해질 무렵에 즉흥적으로 찿아가 본 광주호 호수 생태원은

한적하고  편안함 속에 여유를 즐길 수 있어 가볍게 산책해도 좋을 코스더군요.

복잡한 도심에서 잠시 벗어나 광주호를 바라보면서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모든 근심 걱정일랑 저 넓고 깊은 호수속에 훌훌 던져 버리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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